hlod:detailExplanation
|
-
평민출신이었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문행(文行)으로 알려졌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이 되었다가 지평주사(知平州事)가 되어 혜정이 있었다. 1101년(숙종 6)에 예부상서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이어 이부상서로 옮겼다가 이듬해 상서우복야 겸 삼사사(尙書右僕射兼三司使)가 되었다. 1103년에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추밀원사 겸 태자빈객으로서 비서감(秘書監) 정문(鄭文)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송(宋)나라에 갔는데, 그때 송인들로부터 예절이 법도에 맞다는 칭찬을 받았고 송나라의 황제는 금폐(金幣)를 하사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뒤 1105년에 검교태위수사도(檢校太尉守司徒)·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태자태보(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兼太子太保)·판상서예부사 수국사(判尙書禮部事守國史)가 되었다. 그 해 문하시랑동평장사가 되고 뒤이어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해졌다. 1106년(예종 1)에는 문덕전대학사 상주국(文德殿大學士上柱國)이 되었다. 1107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서 권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權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가 되었으며, 그 해 왕에게 서경(西京)의 용언(龍堰) 옛터에 새로 궁궐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1109년 9성(城) 환부에 대한 논의가 일자 이를 지지하였으며,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이 여진에게 패배한 죄를 극론(極論)하였다. 이듬해 판이예부사(判吏禮部事)가 되었다. 1111년에 수태부(守太傅)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청렴하였으나 관용이 적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