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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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병부상서 원황(元晃)이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거쳐 1098년(숙종 3) 좌우유덕(左右諭德)·상서이부시랑 지어사대사(尙書吏部侍郎知御史臺事), 1101년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1103년 지추밀원사, 1105년 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태자태사 수사공(太子太師守司空), 1106년(예종 1)에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 1107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가 되고, 1109년 평장사(平章事)로서 최홍사(崔弘嗣) 등과 함께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의 여진정벌에 패한 책임을 들어 극론하고, 구성(九城) 환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실현하게 했다. 1110년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門下侍郎平章事判刑部事), 1112년 문하시중으로 협모위사공신(協謀衛社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이듬해에 수태부 판상서이부사(守太傅判尙書吏部事)로서 낙랑백(樂浪伯)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하므로 왕이 특별히 좌부승선(左副承宣) 안당영(安唐穎)을 보내 궤장(几杖 :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얼마 후 허락했다. 1122년(예종 17)에는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翊聖功臣)에 낙랑공(樂浪公)이 되었다. 예종으로부터 당시 최고의 국로(國老) 대접을 받았으나, 권세를 믿고 재산을 모으며 주택을 웅장 화려하게 꾸민다는 비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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