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ed Data Resources View

  • Linked Data Text Browser
  • Datasets
  • Resources
검색
view MetaData view Dataset Statistics [This page as RDF]
인명 : 소현세자
Property, Value
Property (50) Value (116)
hlod:birthDate
  • 1612년
  • 1612년 2월 5일
hlod:birthPlace
  • 한성(漢城)
hlod:deathDate
  • 1645년
  • 1645년 5월 21일
hlod:deathPlace
  • 창경궁 (昌慶宮) 환경전(歡慶殿)
hlod:detailExplanation
  • 소현세자는 1612년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에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이원익(李元翼)·장유(張維) 등을 빈사(賓師)로 맞아 왕자의 덕을 닦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겨 청나라에 항전하려 했으나, 청군의 빠른 남하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같이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그는 단순한 질자(質子)가 아니라 대사(大使) 이상의 외교관 소임을 하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서양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서인들의 집권과 함께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으며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했다.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소현세자는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환영보다는 냉대였으며, 세자에 대한 군신의 진하(進賀)도 못하게 막아버렸다.소현세자는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그런데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병에 걸린지 4일만에 급서했으며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 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의 사인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관례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례도 세자의 지위에 맞지 않는 박대에 예법으로 치뤘다.그리고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그 뒤 세자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민회빈은 물론 두 아들과 그의 친정식구, 그리고 세자빈과 친했던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하였다.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며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hlod:explanation
  •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가 왕이 되자 1625년(인조 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나 1647년 정월에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와 함께 성밖으로 나왔다.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후 자진하여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심양에 9년 동안 있으면서 1642년 3월과 1644년 정월에 두 차례 본국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심양에서의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조청(朝淸)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였다.소현세자는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청의 왕족 및 장군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1644년 9월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서양인이 주관하고 있던 천문대를 찾아가 역법(曆法)에 관심을 가지는 등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그러나 인조와 조정에서는 소현세자의 이러한 점을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9년 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5년 2월 18일에 입경했으나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눕게 되고 4일 만인 26일에 급서하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hlod:familyPlace
  • 전주(全州)
foaf:gender
hlod:hasBrother
  • 낙선군
  • 숭선군
  • 용성대군
  • 인평대군
  • hlod:효종
hlod:hasChild
  • 경녕군주
  • 경선군
  • 경숙군주
  • 경순군주
  • 경안군
  • 경완군
hlod:hasContentsInfo
hlod:hasEducationInfo
hlod:hasFather
hlod:hasFatherInLow
  • 강석기
hlod:hasGrandFather
  • 원종
hlod:hasGrandMother
  • 인헌왕후
hlod:hasGrandSon
  • 임성군
  • 임창군
hlod:hasGreatGrandFather
hlod:hasMaternalGrandFather
  • 능안부원군구사맹
hlod:hasMother
  • 인열왕후
hlod:hasRelatedEventInfo
hlod:hasSister
  • 효명옹주
hlod:hasSonInLaw
  • 능창부위구봉장
  • 행금창부위박태정
  • 황창부위변광보
hlod:hasSourceInfo
hlod:hasWife
  • 민회빈
hlod:nationalPlace
  • 조선(朝鮮)
hlod:occurAge
  • 조선
hlod:occurDynasty
  • 인조
hlod:occurPlace
  • 청(淸) 심양(瀋陽)
hlod:personType
  • 왕족>왕자
hlod:posthumousName
  • 소현(昭顯)
hlod:realName
  • 소현세자
  • 이왕(李汪)
hlod:realNameChi
  • 李汪
hlod:reignStartDate
  • 미상
hlod:relegionName
  • 유교
hlod:religionName
  • 유교
hlod:tdContents
hlod:tdHeadCopy
  • 청에서 새로운 서양문물에 눈뜨다
hlod:tdHistoricalMaterial
hlod:tdIndex
hlod:tdMultimedia
hlod:titleKor
  • 소현세자
hlod:tombPlace
  • 소경원(昭慶園)
hlod:topicDBContents
hlod:topicDBHeadCopy
  • 청에서 새로운 서양문물에 눈뜨다
hlod:topicDBHistoricalMaterial
hlod:topicDBIndex
hlod:topicDBMultimedia
hlod:topicDBRelatedInfo
RDF:ty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