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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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이듬해에는 풍천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영락 16, 태종 18)부터 1645년(홍광 1, 인조 23)까지의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강한집』 32권 15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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