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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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왕의 총신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되어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안렴사가 되고, 1304년에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07년에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안분(安奮)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승진되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다. 1303년에 여러 대신들이 세자 충선을 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그는 박경량(朴景亮)·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세자의 위(位)를 보전하였다. 이에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이 해에 원나라 티베트[土藩]에 귀양간 상왕[忠宣王]의 환국을 위하여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 고(瀋陽王 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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