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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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판관이 되고, 국학학록(國學學錄)·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나주(羅州)·정주(靜州)·승천부(昇天府)·장흥부(長興府) 등의 수령이 되어 정치를 잘하였다. 원종 때에는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청·전라·경상 3도의 안렴사(安廉使)를 역임하며 위명(威名)을 떨쳤으며 백성들도 경외하였다고 한다.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으나 당시의 권신 임연(林衍)에게 거슬려 1269년(원종 10)에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임연이 죽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예빈경(禮賓卿)·간의대부(諫議大夫)·판소부 동궁시강학사(判少府東宮侍講學士)를 역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경상도안무사로 다녀와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승진하였으며, 충렬왕이 즉위하게 되자 그의 재명을 듣고 중용하였다. 한림학사에 제수하고 삼사사(三司使)로서 경상도계점사(慶尙道計點事)로 나가 유망민을 초집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부지밀직 전법판서(副知密直典法判書)에 나아갔으며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성품이 활달하였으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근검하였고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함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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