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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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89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에 궁내부협판이 되고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로 의정부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를 지낸 뒤 이듬해 2월 23일에는 외부대신서리로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협정, 조인하였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이 상당히 높아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그와 참사관인 통역 구완희(具完喜)를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인 이토(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그를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귀국한 뒤 법부대신·규장각학사·판돈녕부사·교육부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역임하였는데,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을 받고, 격앙된 군중에 의하여 집이 방화되었다. 1907년 5월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고,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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