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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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장릉참봉(長陵參奉)과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등을 지내다가, 1748년(영조 24)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었다. 1752년 정언(正言)으로서 언로확대를 주장하였으며, 뒤에 지평(持平)과 대사간을 거쳐 승지로 취임하였다. 1769년 왕은 홍봉한(洪鳳漢)에게 “철이 고서를 많이 읽고 성격 또한 침착하고 깨끗한데 너무 오랫동안 침체시켜두었다.”고 말하면서 발탁의 뜻을 비춘 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 해 전라도 광주지방 유생들이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서 출척하려고 상소하자 지배층의 노여움을 사 박해를 받았는데, 그 곳 유생들을 옹호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1775년 다시 승지가 되고, 영조가 죽자 그의 행장(行狀)과 시장(諡狀)을 짓기 위하여 찬집청(撰集廳)을 세웠는데, 이때 채제공(蔡濟恭) 등과 같이 당상(堂上)이 되어 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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