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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의 한 사람. 친일파.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근용(根0x936B). 충청북도 충주 출신. 1882년(고종 19) 민비(閔妃)가 난을 피해 충주에 갔을 때 신선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민비와 알게 되었다. 얼마 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호송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민비가 환궁하자 1883년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뒤 1885년 선전관이 되었으며, 그 뒤 1886∼1895년까지 단천부사·희천군수·당상선전관·길주목사·충청수사·전라병사·총어영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금군별장·부평부사·좌부승지 및 친위대 제3대대장을 역임하였다. 1896년 육군참령에 임명되어 아관파천 때 이창렬(李彰烈) 등과 짜고 협가환어(脅駕還御)의 계획을 세웠으나 이용태(李容泰)의 고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897년민영기(閔泳綺)의 노력으로 석방된 뒤 1898년 독립협회를 반대하고, 그 회의 해산에 공이 있다 하여 11월 한성부판윤에 오르고 곧 경무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함경북도관찰사·중추원의관, 1901년 경부협판·경부대신서리를 거쳐 육군참장으로 헌병사령관을 겸임하였다. 1902년 평리원 재판장서리, 의정부찬정, 경위원총관(警衛院總官)을 거쳐 원수부 검사국총장으로 경무사를 겸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육군부장·군부대신·원수부 회계국총장·특명전권공사 등을 거쳐 1904년 호위대총관·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905년 주전원경(主殿院卿)·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농상공부대신·법부대신이 되고, 이어 일본국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고, 9월 군부대신이 되었다. 그 해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5적신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아, 민중의 피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1906년 4월 훈1등태극장을 받고 그 해 11월에 중추원의장이 되었으며, 1907년 중추원고문으로 전임하였다. 1910년 8월 우리 나라가 일제에 병탄될 때 협조한 공으로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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