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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고종 2)∼1945. 개항기·일제강점기 때의 문신·관료·정치가·사회운동가.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 충청남도 아산 출신. 할아버지는 취동(取東)이다. 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개화인사였던 웅렬(雄烈)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어려서는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찰을 마치고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882년에는 동경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Millet,L.G.)와 동경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한, 체류 중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유하였다. 1883년 초대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었다.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 간의 교량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정치 개혁에 힘썼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각별히 친밀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85년 1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미국총영사 스탈(Stahl,G.)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3년 6개월 동안 보다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다. 또한, 이 학교의 선교교육자 알렌(Allen,A.J.)학장과 본넬(Bonnel,W.B.)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인도되었다.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알렌과 본넬의 알선과 감리교회의 후원으로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 영어코스에서 3년, 즉 6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여기서 틸레트(Tillet)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에모리(Emory)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수강했고, 캔들러(Candler,W.A.)학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교내외 각종 행사와 집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유학 기간에는 메이지유신의 근대화과정과 자유민권운동을 체험하였다. 중국유학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기독교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유학 기간에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와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사회를 체험하였다. 이처럼 전통사회와 근대화과정사회, 그리고 근대사회를 고루 체험함으로써, 전통사상·전통질서·전통체제를 철저히 부정하고 근대사상·근대질서·근대체제를 적극 수용하여 조국을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변혁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95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를 거쳐 귀국한 뒤 외부협판과 학부협판 등을 지냈다. 1896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Nicolai Ⅱ)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였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가담해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었다.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1898년 8월 제2대 회장이 되어 이 해 10월 1만여 명이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대외적인 자주국권의 수호와 대내적인 자유민권의 보장 및 근대적인 자강체제의 수립을 포괄하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해 국정에 반영시켰다. 또한, 독립신문의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자주국권운동과 자유민권운동 및 자강개혁운동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독립협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테러에 의한 1898년 12월 정부의 강제해산조처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이 좌절되었다. 민중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은신하고 있던 중, 1899년 덕원감리 겸 덕원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00년 6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1901년 7월에는 다시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에 복귀하였다. 1903년 7월 천안군수, 1904년 2월 무안감리로 발령받았다가 부임 3개월 전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민의 자주자강 정신과 능력을 기르는 데 힘썼다.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해 원장으로서, 그리고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하는 신민회의 교육기관인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에 진력하였다. 한편,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을 맡고,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한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 1912년에는 일제가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옥중생활을 하다가 1915년에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YMCA의 총무와 회장으로 활동했고,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사와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체육회 회장과 민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회장으로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실력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교풍회(矯風會)·각도조선인대표자대회·조선인산업대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친일활동을 하였다. 1941년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과 1945년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이 있고, 역술서로 『찬미가』, 번역서로 『의회통화규칙』·『이솝우화(伊索寓話)』·『걸리버여행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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