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ed Data Resources View

  • Linked Data Text Browser
  • Datasets
  • Resources
검색
view MetaData view Dataset Statistics [This page as RDF]
인명 : 유인석
Property, Value
Property (39) Value (78)
hlod:aliasName
  • 김두성(金斗星)
hlod:birthDate
  • 1842년 1월 27일
hlod:birthPlace
  • 강원 춘성
hlod:childhoodName
  • 유재신(柳再新)
hlod:deathDate
  • 1915년 3월 14일
hlod:deathPlace
  • 연해주 목화촌(포시에트)
hlod:detailExplanation
  • 1842년 강원도 춘천시(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 여성(汝聖), 호 의암(毅菴)이다. 조선후기 철종 때의 위정척사론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년 그가 죽자, 이항로의 수제자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였으며, 뒤에 그 자신도 제천(堤川)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그는 주자와 송시열을 추모하였으며 1865년 조선 주자학의 본산이자 명나라 신종의 위패를 봉안하는 화양동 만동묘(萬東廟)가 훼철되자 이를 통탄하였으며 1884년 만동묘가 복원되자 참배하였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주자학에 심취하여 이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으며 스승인 유중교가 설립한 강학당을 맡아 운영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봉기를 모의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을미사변과 복제개혁과 단발령 등이 내려지자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 유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싸울것을 다짐하였다. 유인석의 이러한 움직임이 있자 고종은 밀지를 보내 전국에 의병을 일으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승인을 내려주었다. 유인석은 단양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며 진군했고 영월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이끄는 의병대는 충주(忠州)로 진군하여 부패관리들을 죽였으나, 제천에서 관군에게 패전하고 강원도로 퇴각했다가 평안도를 거쳐 북상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청나라 회인현(懷仁縣)에 은신하면서 청나라 원세계의 지원을 받기위해 심양으로 갔지만, 군사지원이라는 성과를 얻지 못했다. 서간도 일대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은거하다 1897년 고종황제의 유지(諭旨)가 내려 한때 귀국하였다가, 1898년 가족과 뜻을 함께 하는 문인들을 이끌고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오도구진(五道溝鎭)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향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위협을 느끼고 다시 귀국하여 평안도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그는 서북지방 유림들의 지지를 받으며 화서학파의 사상과 의병활동을 기록한《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였다. 그는 향약을 실천으로 공자와 맹자, 주자의 전통적 유교사상을 보존해야함을 강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통탄하며 외래문물을 반대하며 일본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09년(융희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창설하여 이범윤, 이남기, 우병렬, 안창호, 홍범도, 이상설 등이 함께하였으며 유인석은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었다. 그는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3도의군은 신식무기에 약 40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간부들을 체포하고 의병대는 해체되고 말았다. 1910년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단체인 권업회에 총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15년 연해주 목화촌(포시에트)에서 병사하였다. 유인석은 이항로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hlod:explanation
  • 1842~1915. 조선후기 학자, 의병장.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hlod:familyPlace
  • 고흥(高興)
foaf:gender
hlod:hasArtworkInfo
hlod:hasBadgeInfo
hlod:hasChild
  • 유제함
  • 유해동
hlod:hasEducationInfo
hlod:hasFather
  • 유중선
hlod:hasGrandFather
  • 유영오
hlod:hasMother
  • 고령신씨
hlod:hasRealFather
  • 유중곤
hlod:hasRelatedEventInfo
hlod:hasRelatedOrganizationInfo
hlod:hasRelatedRelicInfo
hlod:hasSourceInfo
hlod:hasWife
  • 여흥민씨
hlod:jaName
  • 여성(汝聖)
hlod:nickName
  • 이봉(尼峰),의암(毅菴)
hlod:occurAge
  • 조선,대한제국
hlod:personType
  • 사회운동가
hlod:realName
  • 유인석(柳麟錫)
hlod:realNameChi
  • 柳麟錫
hlod:reignStartDate
  • 미상
owl:sameAs
hlod:tdContents
hlod:tdHeadCopy
  • 의병장으로 위정 척사에 앞장서다
hlod:tdHistoricalMaterial
hlod:tdIndex
hlod:tdMultimedia
hlod:tdRelatedInfo
hlod:titleKor
  • 유인석(柳麟錫)
RDF:ty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