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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오세창
Property, Value
Property (32) Value (103)
hlod:birthDate
  • 1864년 7월 15일
hlod:deathDate
  • 1953년 4월 16일
hlod:detailExplanation
  •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호는 위창(葦滄), 자는 중명(仲銘)이다. 역관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조선 말의 개화사상가인 역매(亦梅) 경석(慶錫)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하다가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농상공부 참의(參議)·우정국 통신원국장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청받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귀국 후 모함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리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인 1902년 일본에서 양한묵(梁漢默)·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 귀국하여 만세보사(萬歲報社)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 사장, 대한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피난 중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저서에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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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1953.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 개화파 정객으로 손병희를 뒷받침해 동학의 천도교로의 전환을 주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한성순보 기자를 지냈고 우정국 통신원국장등을 역임했다. 만세보사, 대한민보사 사장을 지냈고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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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주(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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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Child
  • 오일육
hlod:hasFather
  •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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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명(仲銘)
hlod:nickName
  • 위창(葦滄),위창(韙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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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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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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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세창(吳世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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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吳世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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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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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암(閒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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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전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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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세창(吳世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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