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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양주삼
Property, Value
Property (22) Value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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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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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안남도 용강
hlod:changedName
  • 梁原柱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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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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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말기인 1879년(고종 16)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190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서 중서서원(中西書院)을 졸업한 뒤 1905년 영국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여 한인(韓人) 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전도사로 일하였다. 1910년 밴더빌트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한 뒤 목사가 되었으며, 1914년 다시 예일대학 신학부를 마치고 이듬해 귀국하여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교수가 되었다. 1916년에는 《신학세계(神學世界)》를 창간하였고, 이듬해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 부교장이 되었으며, 1919년 서울 종교교회(宗橋敎會) 목사가 되었다. 1922년 미국 남감리회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중국 둥베이[東北]지방·시베리아 선교사업 총책임자가 되었으며, 1930년 조선 남·북 감리회의를 규합하는 데 성공하여 지금의 감독회장 격인 초대 총리사가 되었다. 1936년 해주(海州) 구세요양원 이사를 거쳐 1938년 조선기독교서회(朝鮮基督敎書會) 이사 등을 역임한 뒤 만주지방 선교사업을 관장하다가 귀국한 뒤 1941년 서울 배화(培花)고등여학교 재단이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감리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교파합동에 기여하기도 하였으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찬성하고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미·영 타도\" 좌담회에서 태평양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등 친일행적의 오점을 남겼다. 이로 인하여 광복 후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처벌되지는 않았고, 그해 10월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이듬해 6·25전쟁중에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된 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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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 평남 용강 출생. 감리교 목사. 협성신학교 교수, 종교교회 목사, 기독교조선감리회 초대 총리사 등을 역임.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글과 연설을 다수 발표함.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일제의 전시통제기구 간부를 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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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사당(白沙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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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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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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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삼(梁柱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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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梁柱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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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성부(京城府) 필운정(弼雲町) 28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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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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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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