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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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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erty (29) Value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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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靑山里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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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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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중 1920년 10월의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군 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奉天省)의 경계지역인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여,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부터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의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를 시작으로, 홍범도부대의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김좌진 부대의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협공한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와 고동하곡전투(古洞河谷戰鬪)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백종렬(白鍾烈)·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이었다.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韓民會)·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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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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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린성;길림성(吉林城) 허룽현;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理)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_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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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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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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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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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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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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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즈마
  • 야마타
  • 야스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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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항일무장투쟁, 국방·군사>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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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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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 무장 독립 투쟁의 최대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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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靑山里大捷
hlod:titleEng
  • Battle of Qingshan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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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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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 국방·군사>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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