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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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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erty (27) Value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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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鳳梧洞勝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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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오동승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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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4일,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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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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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린성;길림성(吉林省) 허룽현;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_중국, 허룽현;화룡현(和龍縣) 삼둔자(三屯子)_중국, 함경북도(咸鏡北道) 강양동(江陽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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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리 대첩의 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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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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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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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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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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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스카와_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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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방·군사>전쟁·전투,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항일무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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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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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산리 대첩의 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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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鳳梧洞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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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ngoh town B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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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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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방·군사>전쟁·전투,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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