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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6·10만세운동
Property, Value
Property (29) Value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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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六十運動, 六十萬歲運動, 六十萬歲事件, 丙寅萬歲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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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운동, 육십만세운동, 육십만세사건, 병인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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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운동을 준비한 집단은 세 계열이 있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계열, 李柄立을 중심으로 한 사직동 계열, 박용규·이동환 등의 通洞 계열이 그것이다. 조선공산당 계열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권오설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이 국장일을 이용하여 대중적 시위를 전개할 것을 논의, 조선공산당 상해부(上海部) 책임자 김단야(金丹冶)와 연락하고, 5월 15일 경부터 박래원(朴來源, 조선공산당원, 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 문창식(文昌植, 조선공산당원, 인쇄직공조합 집행위원), 이용재(李用宰, 인쇄직공조합원), 양재식(楊在植, 인쇄직공조합원), 白明天과 함께 선언문을 인쇄하였으며, 선언문에는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이라는 가공 단체명의 인장을 찍었다. 인쇄된 선언문 중 일부는 개벽 등 여러 잡지에 동봉하여 각 도청, 기타 관공서, 지방 청년단체에 배부토록 하고, 일부는 총독부, 재판소 등 중요 관청에 광고우편으로 발송하고, 나머지는 천도교당 내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감추었다. 그러나 경찰이 위조지폐범을 조사하던 중 천도교당에 숨겨둔 선언문이 발각되면서 권오설 이하 선언문 인쇄 가담자들이 체포되면서 불발되었다. 다만 미리 선언문 배포책임자로 선정되어 있던 이병립(李柄立)은 인산일 당일에 압수되지 않은 선언문의 일부를 배포하였다. 사직동계 운동은 이병립, 이선호(李先鎬), 박하균(朴河鈞), 이천진(李天鎭), 유면희(柳冕熙), 박두종(朴斗鍾)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는데,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회원 약 80여 명이 4월 25일 야유회 도중 순종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이를 기회로 단체행동을 전개할 것을 비공식적으로 발언하고, 5월 20일 각 학교대표 40여 명이 박두종의 방에서 모여 6월 10일로 전해진 인산일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선정된 준비책임자는 박두종, 이선호, 이병립, 박하균, 이천진이었다. 이들은 태극기과 조선독립만세기를 작성하고, 6월 6일 이석훈의 방에서 선언문 인쇄하였는데, 선언문 원안은 이병립이 작성하였고, 인쇄된 선언서는 약 1만 매였다. 선언서에는 극히 간단한 반일구호 외에 특별한 주장이 들어 있지 않았다. 준비책임자 5명과 유면희는 선언서와 태극기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배부하여 인산일에 독립만세를 고창하도록 하였다. 이병립, 박하균은 관수교 부근에서, 이선호, 유면희는 단성사 앞에서, 이천진은 훈련원 봉결식장 뒤에서 박두종은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각각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선언서를 살포하였다. 통동계의 운동은 이동환(李東煥), 박용규(朴龍圭), 김재문(金載文), 곽대형(郭戴炯), 황정환(黃廷煥)이 중심이 된 것으로 통동에 있는 김재문의 하숙에서 선언문을 제작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다. 6월 10일로 인산일이 정해지자, 이동환, 김재문, 황정환은 이를 기하여 할 일을 모의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여, 5월 23일 각급 학교대표 50여 명이 회동하여 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이동환, 박용규, 김재문, 곽대형, 황정환이 공동으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5월 30일까지 선언문의 인쇄를 마치고, 서울과 지방의 중등학교에 4~5매씩 선언문을 우송하였다. 인산일 당일에 김재문, 곽대형, 황정환은 숭인동에서, 이동환, 박용규는 단성사 앞에서 선언문을 살포하였다. 이 선언문에는 구체적인 투쟁사항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채 간략한 반일구호만 있을 뿐이고, 김성수(金性洙), 최린(崔麟), 최남선(崔南善)을 조선민족대표로 선언서에 기입하고 있다. 인산일 당일 연도의 2만 3천여 명의 학생들 외에 30만 명에 달하는 일반시민들이 연도에 봉도해 있는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나 5천명의 병력과 경관, 헌병, 기마경찰들이 투입되어 경계함에 따라 시위는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운동에 가담하여 현장에서 체포된 210명 중 취조를 받은 사람은 100여 명이며, 이 중 대부분은 기소유예 혹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고, 사직동계와 통동계의 주모로 인정된 11명만을 제령(制令) 7호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 운동은 1924년 이후 침체된 민족주의운동을 고무하였다는 의의가 있으며, 학생운동에도 자극과 활력을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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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독립운동/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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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성(京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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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학생 중심의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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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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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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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SocietyEtcPerson
  • 손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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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대형
  • 김단야
  • 김재문
  • 문창식
  • 박두종
  • 박래원
  • 박용규
  • 박하균
  • 백명천
  • 양재식
  • 유면희
  • 이동환
  • 이병립
  • 이선호
  • 이용재
  • 이천진
  • 황정환
  • hlod:권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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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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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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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민족주의운동(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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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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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종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민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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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六十萬歲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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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ne 10th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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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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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운동/독립운동>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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