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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남만주에서 활동한 민족 운동 단체이자 한인 자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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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2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대한독립단 등의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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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통합운동이 재개되어 1924년 7월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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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대한통의부·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固本契) 등의 각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吉林省柳河縣)에서 모여 통합회의를 개최한 결과, 1924년 11월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가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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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유하현에 본부를 두고 1925년 3월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앙행정위원장 이탁을 비롯하여 민사 현정경, 선전 이종건(李鍾乾), 재무 김이대, 군사 지청천, 법무 이진산(李震山), 학무 김용대(金容大), 교통 윤덕보, 생계 오동진, 외교 김동삼(金東三) 등의 위원장을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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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5년 7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에 정의부 간부 이상룡(李相龍)이 선임되어 재만항일독립운동단체를 중심으로 한 연립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임시정부를 높이 평가하지 않던 재만독립운동단체들의 입각거부로 조각에 실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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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6년 2월 이상룡은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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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6년 1월 중앙의회 상임위원장 이해룡(李海龍)은 비상수단으로 정의부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를 조직하고, 결의 사항을 포고하며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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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6년 10월 정의부는 제3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군민대표회에서 민정으로 복구하고 헌장을 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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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노령에서 온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국내에서 온 천도교혁신파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 등과 접촉하여, 1926년 3월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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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7년 12월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을 비롯한 정이형·이동락·이동구 등이 일본경찰에 붙잡힘으로써 고려혁명당은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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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8년 2월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회합을 가지고 삼부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민족유일당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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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1928년 5월 길림성 반석현(盤石縣)에서 만주의 18개 독립운동단체 대표 39명이 모여 유일당 구성문제를 토의하였으나, 기성단체를 부정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와 기성단체 본위를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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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일부세력을 합쳐 1929년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고 정의·참의·신민 3부를 해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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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의부·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固本契) 등의 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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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헌법체제인 삼권분립제도, 내각책임제와 지방자치제의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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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에서 활동한 민족 운동 단체이자 한인 자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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