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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3・1 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수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국
[설명]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3·1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는 파리강화회의 등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독립만세운동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으로써도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이후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할 기관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초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곳은 7군데였다. 가장 먼저 등장한 임시정부는 러시아령에서 만들어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러시아령 한인들의 단체였던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개칭한 것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3월 21일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한편 1919년 3월 하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대한민국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에서 추진된 한성 임시정부와의 통합과정을 거쳐 9월에 이르러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6일에 대통령제개헌(제1차 개헌)에 따라 발표한 초대 각료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노동국 총판에 안창호(安昌浩)였다. 이어 9월 11일에 민주공화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는데, 헌법은 삼권분립을 표방,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하였다. 행정부는 대통령제로 운영되고, 국무총리 아래 내무, 외무, 재무, 군무, 법무, 학무, 교총, 노동 등 8개 부를 두었다. 임시의정원은 출신지역별로 선임된 의원으로 구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행정부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후 1925년에 국무령제로 개헌, 1927년 국무위원제로 개헌, 1941년 주석제로 개헌, 1944년 주석·부주석제로 개헌하였다. 국내외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외에는 상해, 천진(天津), 만주(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가 대신),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가 대신) 등지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交通所)를 신설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 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연통제에 따라 서울에 총판을 두고 각 도·군·면에 독판·군감·면감을 두었는데, 국내에는 9개도 1부 45개 군에 조직을 두고 만주에는 3개 총판부가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금 갹출(醵出)운동 등 다양하였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주로 국내 북서지방에 집중되었고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중부 이남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 임무를 대행하였다. 재정기반을 위해 애국금과 인구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였으나 이 중 공채는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하였다. 초기 재정의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뒤에는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충당되었다. 한편,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료조사편찬부를 설치하고《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기관지로 《독립신문》, 《신대한보(新大韓報)》,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 《공보(公報)》등을 간행하여 독립정신을 홍보하고 소식을 국내외 각지에 알렸다. 해외의 구미위원부에서는《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과 국제정세 등에 의해 상해(1919), 항주(杭州, 1932), 진강(鎭江, 1935), 장사(長沙, 1937), 광주(廣州, 1938), 유주(柳州, 1938), 기강(綦江, 1939), 중경(重慶, 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지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시기(1919∼1932)에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국외에서의 외교활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국내와의 연결이 일본 경찰에 의해 어렵게 되는 등 시련을 겪는 속에 국무총리 이동휘의 소련자금의 유용 소동과 대통령 이승만의 독주가 겹쳐져 정부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후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 수합을 위해 국민대표회의(1923)가 소집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 등을 추진하였지만,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침체를 면치 못했던 임시정부는 1932년 1월의 이봉창(李奉昌)의 동경의거와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 등,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의열투쟁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러나 일제가 임시정부 요인과 애국단원의 체포에 총력을 기울이자,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겼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1939년 기강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중경으로 옮겼는데, 이 시기(1940∼1945)에는 상해시기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가장 주목할 성과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에, 이미 2월에 신한청년당이 국민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주파리위원으로 임명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열강들의 약소국에 대한 의견 무시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지만, 김규식은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한국 문제가 국제 문제로 부각되도록 힘을 다하였다. 7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 제2차 인터내셔널)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았던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을 광동(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본보기는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이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비행사양성소·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1940년 광복군을 창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다.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할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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