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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김동원
Property, Value
Property (26) Value (77)
hlod:aliasName
  • 가네오카 히가시모토(金岡東元)(창씨명)
hlod:birthDate
  • 미상
hlod:birthPlace
  • 평안남도(平安南道) 대동군(大同郡)
hlod:deathDate
  • 1951년 3월 20일
hlod:deathPlace
  • 북한
hlod:detailExplanation
  • 1903년에 평양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 신병으로 중퇴, 귀국하였다. 1910년부터 6년 동안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이 때 안창호(安昌浩)와 교유하며 민족문제를 협의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에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출옥 후 실업계에 투신하여 목재, 면직물 등의 판매업에 종사하였으며, 1924년 평안고무공업사를 설립함으로써 산업자본가로 전환하였다. 한편 숭인상업학교, 숭실전문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여 상공업을 통해 벌어들인 재산을 교육계에 투자하였으며, 예수교장로회총회 부회계 및 평양 YMCA 회장 등을 지내며 기독교계의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조직하였다. 1925년 동우구락부를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다시 1930년에는 동우회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1934년 조선소년척후대 평남연맹의 간부로 보이스카우트운동에 종사하였다. 1935년 평안농사주식회사(平安農事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이듬해에 평안고무공업사를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여 만주 진출을 기도하였다. 또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경찰의 후원으로 저지한 뒤, 평양상공회의소 특별 평의원과 부회장을 지내며 총독부측과의 유대관계에 힘썼다. 1937년에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1940년 황도학회(皇道學會),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대성학원(大成學院)을 설립, 운영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한국민주당에 참여, 창당시 총무를 담당하였으며, 1947년 조직개편 때는 기획부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미군정장관 고문으로도 활약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으로 제헌의회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의원 직선으로 거행된 국회부의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6·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hlod:explanation
  • 평양의 대부호 대윤(大潤)의 맏아들로 소설가 김동인의 형이다. 일제강점기에 평안도 지방을 대표하는 민족주의계 인사로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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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全州)
foaf:gender
hlod:has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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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EducationInfo
hlod:hasFather
  • 김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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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RelatedOrganizationInfo
hlod:nationalPlace
  •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hlod:occurAge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hlod:occurPlace
  • 평양,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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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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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원(金東元)
hlod:realNameChi
  • 金東元
hlod:reignStartDate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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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원(金東元)
hlod:tombPlace
  •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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