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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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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erty (36) Value (135)
hlod:anotherNameKorChac
  • 朝鮮之役,萬曆之役,壬辰倭禍,壬辰祖國戰爭,壬辰衛國戰爭,壬辰年朝日戰爭,壬辰年朝倭戰爭,萬曆朝鮮之役,萬曆朝鮮戰爭,萬曆東征,壬亂,壬辰亂,壬辰民族守護戰爭,朝日戰爭
hlod:anotherNameKorEng
  • Japanese Disturbance of Imjin(1592),Wanli Korean Campaign,Renchen War to Defend the Nation
hlod:anotherNameKorKor
  • 조선지역,만력지역,임진왜화,임진조국전쟁,임진위국전쟁,임진년조일전쟁,임진년조왜전쟁,만력조선지역,만력조선전쟁,만력동정,임란,임진란,임진민족수호전쟁,조일전쟁
hlod:detailExplanation
  •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그러나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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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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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牙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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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 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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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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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8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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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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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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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방·군사>전쟁·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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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抗倭援朝戰爭,朝鮮之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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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祿慶長の役,文禄の役,慶長の役,朝鮮征伐,日明戰爭,征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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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진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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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공청
  • 속오군
  • 투순군
  • 훈련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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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일본의 대륙 침략 야망을 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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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壬辰倭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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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壬辰倭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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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panese invasions of Korea(15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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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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