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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승려 유정(惟政)이 지은 임진왜란 때의 사적. 7권. 목판본. 1739년(영조 15) 밀양 표충사(表忠寺)에서 개판하였다. 유정의 5대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이 전하여 오던 유정의 유고를 이 시기에 새로 출간하였다. 원래는 ‘골계도(滑稽圖)’라는 제명이었던 것을 편자인 신유한(申維翰)이 평석을 가하고 체재를 갖추면서 ‘분충서난록’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내용은 적진을 탐지한 보고서와 상소문, 왜승(倭僧)에게 보낸 서한 등으로 편집되어 있다. 먼저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에는 자신이 직접 가토(加藤淸正)의 진중에 들어가서 담판한 내용과 적정의 허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양국간의 화해를 전제조건으로 한 화친의 조건 등이 쌍방에 명시되고 있다. 두 번째는 별고적정(別告賊情)으로서, 고니시(小西行長)와 심유경(沈惟敬) 사이의 화친조약이 맺어지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던 가토와의 면담을 수록하였다. 세 번째는 왕알유독부언사기(往謁劉督府言事記)로서 중국사신에게 자신의 적진정보를 술회하는 내용이다. 다음에 있는 상소문 2편은, 적을 토벌하는 방책과, 빨리 백성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끝에는 승태(承兌)·원광(圓光)·현소(玄蘇)·숙로(宿蘆) 등의 왜승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실었다. 이 부분은 대개 유정의 친필이지만, 신유한의 개판 때는 이에 덧붙여서 유정에 관련되는 기록을 발췌하여 실었다. 주로 ≪지봉유설≫·≪난중잡기 亂中雜記≫ 등에서 뽑았으며, 신유한은 적절한 주석을 붙이고 있다. 또, 유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린 각종 공덕문과 공경대부들의 시문(詩文), 그리고 표충사에 관련되는 기록들도 모두 실었다. 이 가운데 적진을 정탐하고 난 뒤의 보고서 2권과 을미년(1595)의 상소문, 그리고 왜승들에게 보낸 서한 등은 유정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믿어진다. 또, 기타의 자료는 비록 그의 친필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에 관한 종합적 보고서는 아니지만, 전시외교(戰時外交)의 허실, 그리고 적정의 탐지 등을 상세하게 기술한 점 등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공경대부를 비롯한 일반 지식인들의 불교에 대한 견해와 유정의 폭 넓은 교유를 밝힐 수 있는 시사성을 주고 있다. 유정이 남긴 문헌으로는 문집 4권과 ≪분충서난록≫이 있을 따름인데, 문집에는 대개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승군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반면 ≪분청서난록≫에는 비록 단편적인 언급이기는 하지만, 유정의 승군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당시의 사회·민심·외교·경제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며, 가장 신빙성 있는 육전(陸戰)의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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