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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로 유명한 것은 개항 뒤 조정의 개화 정책에 반대해온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이 1881년(고종 18)에 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올린 연명소이다. 전년도 여름에 제2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다녀온 뒤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왕에게 진헌하였다. 그것은 조선의 외교 정책이 ‘친청국(親淸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수록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개화자강(開化自强)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안동·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은 전통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하면서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영남만인소이다. 그 내용을 보면 선왕대에는 사교(邪敎)를 엄금했고, 또 병인·신미 양요 때에도 쇄국정책을 펴면서 오랑캐를 강력하게 토벌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이들을 영접하려고 하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이어 일본의 간교함을 지적하면서 그들과의 결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미지의 미국을 끌어 들여 그들의 꼬임과 요구에 말려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될 것임도 경고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해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황준헌이 주장한 외교 정책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지적해 비판하였다. 이처럼 영남만인소에서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의 야심을 논파하고 민족 정의로 부당성을 제시했기 때문에 황준헌의 외교 정책은 수용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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