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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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명종 6)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경기도사·사헌부장령 등을 거쳤으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이성근족(異姓近族)이라 하여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 사간원사간·승정원동부승지·도승지·충청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의 처리에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판서로서 세자 광해군을 호종, 보필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좌참찬으로 재직하면서 토적복수군(討敵復讐軍)을 모집하여 활약하였다. 1598년부터 이듬해까지 잇달아 이조판서를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고, 1599년 선조가 우의정에 임명할 때 “이조판서를 사양하는 자를 내가 보지 못하였는데, 이 사람이 두 차례나 사양하니 가히 정승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좌의정이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성질이 곧고 완고하여 임금 앞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피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하여졌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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