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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이위종
Property, Value
Property (26) Value (50)
hlod:birthDate
  • 1887년
hlod:birthPlace
  • 서울
hlod:changedName
  •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
hlod:deathDate
  • 미상
hlod:detailExplanation
  • 본관 전주(全州) 이씨이다. 주 러시아공사를 지낸 이범진(李範晉)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1896년 부친이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워싱턴으로 갔으며 1899년 부친이 다시 주 프랑스 공사관으로 임명되자 공사관 서기생으로 일했다. 190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냈으며 러시아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에 남아 외교적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부친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위종은 이들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갔다.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만국기자협회를 통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현지에서 울분으로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하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 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 이범윤(李範允)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일본을 의식한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부친 이범진의 자결로 받은 충격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러시아 시민이되어 혁명에 가담하였고 혁명군과 연대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hlod:explanation
  • 1887~?. 한말의 외교관, 독립운동가. 외국어에 능통하여 러시아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함.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좌절됨. 1916년 러시아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적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움.
hlod:familyPlace
  • 전주(全州)
foaf:gender
hlod:hasArtworkInfo
hlod:hasBadgeInfo
hlod:hasCareerInfo
hlod:hasEducationInfo
hlod:hasFather
  • 이범진
hlod:hasGrandFather
  •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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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RelatedOrganizationInfo
hlod:hasSourceInfo
hlod:hasWife
  • 엘리자베타_발레야노브나_놀켄_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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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일제강점기
hlod:personType
  •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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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위종(李瑋鍾)
hlod:realNameChi
  • 李瑋鍾
hlod:reignStartDate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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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titleKor
  • 이위종(李瑋鍾/Vladimir Sergeevich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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