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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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연산군 2)에 당상관이 되었고, 1509년(중종 4)에 좌포도대장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경상도우방어사가 되었다. 이해에 삼포(三浦)의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황형(黃衡)과 함께 김해에서 급히 수군을 조발하여 왜인들이 진장(鎭將)을 죽이고 점거하고 있던 웅천(熊川)·부산포(富山浦 : 동래) 등을 탈환하고 그들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관찰사가 되었다. 1513년에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곧 병조판서가 되었고, 1518년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곧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평안도순변사를 겸임하였다. 그 때 북변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의 세력이 팽창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량과 병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1519년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서 좌참찬이 되었다. 그 뒤 병조판서와 지훈련원사를 거쳐서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37년장경왕후(章敬王后 : 중종의 계비)의 희릉(禧陵)을 옮길 때 그 능 속에서 바위가 드러나 지난날 장례에 참여한 관원들이 처벌됨에 따라 그도 직첩을 추탈당하였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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