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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고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승지, 1884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에 등용되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이후 도승지로서 민응식(閔應植)과 상의, 장은규(張殷奎)를 일본에 밀파해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886년부터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한성부좌윤·예조참판·육영공원변리(育英公院辨理)·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89년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이 때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해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 중 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장(淸將)과 내통, 일본세력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895년 초 원주에 유배되었다. 1895년 민씨척족세력의 부활과 함께 사면된 뒤, 군부대신·학부대신·궁내부대신·철도원총재(鐵道院摠裁) 등의 요직을 지냈다. 관직 외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직조단포주식회사(織造緞布株式會社)·농업회사 등의 조직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민족항일기에는 조선인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서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을 때 특히 행서에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광화문에 있는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와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고구려동명왕릉비(高句麗東明王陵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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