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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김문기
Property, Value
Property (38) Value (79)
hlod:birthDate
  • 1399년
  • 1399년
hlod:choName
  • 김효기(金孝起)
hlod:deathDate
  • 1456년 6월 8일
hlod:detailExplanation
  •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2008년 12월 18일 국사편찬위원회는 1982년 11월 11일 합의사항에서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 바 없음’을 확인하였고, 사육신의 구성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의 6인으로 정의를 하였다.
hlod:explanation
  • 본관 김녕(金寧)이며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초명은 효기(孝起),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되었으며,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1977년 사육신(死六臣)의 1인으로 채택되어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가묘가 설치됨.
hlod:familyPlace
  • 김녕(金寧)
foaf:gender
hlod:hasCareerInfo
hlod:hasChild
  • 종산(終山)
  • 김현석
  • 종산
hlod:hasFather
  • 김관(金觀)
  • 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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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hasGrandSon
  • 김충주
hlod:hasOtherRelation
  •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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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李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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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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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비(奉非)
  • 봉비
  • 선산_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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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공(汝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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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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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촌(白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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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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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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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행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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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의(忠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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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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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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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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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od:titleChi
  • 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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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
  • 김문기(金文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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