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od:detailExpl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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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년(영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교관(敎官)으로 있다가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봉교·정언을 거쳐 1734년 지평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왕이 시정하여야 할 3개조의 치민책(治民策)을 영조에게 올려 가납(嘉納)되었다. 1735년 지평 이태중(李台重)이 왕의 미움을 사 유배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찍이 그를 한림직(翰林職)에 추천한 사실이 있었다 하여 함께 삭직되었다. 그 뒤 교리로 복직되었다가 소론 이광좌(李光佐)의 당으로 지목되어 2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1740년 다시 기용되어 동부승지·의주부윤·대사성을 거쳐, 1746년 부제학에 올랐다. 이 때 『광묘어제훈사(光廟御製訓辭)』를 찬집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이어 동의금부사를 지냈으며, 도승지·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대사헌을 역임한 뒤 1755년 판윤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왕명에 의하여 『천의소감(闡義昭鑑)』이 편찬될 때 찬집당상으로 참여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도천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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