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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05인사건 "1911년 일제가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을 확대 조작하여 애국 지사를 투옥한 사건. 1심공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명이었으므로 '105인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국내 조직이 큰 피해를 입었다."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105인사건 2015-12-09
사건 10도제 "995년(성종 14)에 전국에 10도를 설치한 일."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10도제 2015-12-09
조직 10정 "통일신라의 최상위 지방 행정 단위인 9주(九州)에 주둔했던 군단."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단체_10정 2015-12-09
사건 13도 창의군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에 따라 일어난 정미의병 때 전국에서 모인 의병들이 결성한 군대"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13도_창의군 2015-12-09
사건 2·8 독립 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재일 조선인유학생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2·8_독립_선언 2015-12-09
조직 2군6위 "고려 시대의 경군(京軍)"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단체_2군6위 2015-12-09
조직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 "[정의] 1946년,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를 위해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독립동맹(獨立同盟),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이 합동하여 조직한 기념행사 준비단체. [설명] 1946년 초, 좌익측은 3·1기념투쟁위원회(3·1記念鬪爭委員會), 우익측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己未獨立宣言全國大會 準備委員會)로 나누어 각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6년 1월 14일에 담화를 발표하여, 3·1운동 기념대회를 민주주의 각 정당, 대중단체의 연합으로 성대하게 치를 것을 제의하였다. 2월 12일 신한민족당, 조선인민당,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국민당(國民黨), 조선공산당, 독립동맹, 조선민주당 등 7개 정당 대표자들이 신한민족당 사무실에 모여 기념행사의 통일을 결의, 기성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 및 3·1기념투쟁위원회는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고, 기념행사를 7개 정당에 일임하고 대회의 명예의장은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으로 일제 지배하에 변절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추대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 국민당이 공동성명에 참가할 수 없다며 퇴장하여, 결국 5개 정당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3·1기념투쟁위원회를 즉시 해소하고 5개 정당을 중심으로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다. 이후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 측의 행사 통합에 대한 거듭된 제안과, 자유신문(自由新聞), 조선통신(朝鮮通信), 중앙신문(中央新聞), 공립통신(共立通信),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서울타임스, 합동통신(合同通信), 동아일보(東亞日報), 코리아타임스, 서울신문, 한성일보(漢城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의 일간(日刊)통신·신문대표자회의를 통해 제안한 4개 항목의 통일안도 기미 측에서 거부한다. 결국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의 기념행사는 3월 1일 남산공원 광장에서, 기미 측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각 개최되었다."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단체_3·1기념전국준비위원회 2015-12-09
사건 3·1운동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 3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도시에서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변모했다. 이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중국의 만주와 일본의 도쿄·오사카, 미국의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독립선언문을 작성·서명하고 운동을 계획한 이들이 각 종교와 단체를 연합한 민족대표 33인이라면, 실제 전국적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무명의 학생과 청년들이었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강경 진압해 통계상으로만 3개월 동안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다."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3·1운동 2015-12-09
사건 3포 왜란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3포_왜란 2015-12-09
사건 4군 6진 개척 "조선전기에 여진족을 막기 위해 서북면의 4군과 동북면의 6진을 설치한 사건" http://lod.koreanhistory.or.kr/resources/사건_4군_6진_개척 201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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